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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눔/읽을거리

<87환경주일공동설교> 온천하보다도 더 귀한 목숨을 위하여

 

* 여기 실리는 환경주일 공동설교문은 매년 환경주일을 맞아 한국교회 전체에 보내온 설교문입니다. 환경주일은 1984년에 제정되어 매년 선포되었으나, 이곳에는 몇편의 설교문만 연재해놓습니다.

< 환경주일 공동설교문 > - 1987 환경주일 공동설교
 

반공해운동은 생명운동이다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한 목숨을 위하여
- 마 16:26 - 

 

6월 5일은 15년전 1972년 6월 5일부터 16일까지 스웨덴의 스톡홀롬에서 국제연합 인간환경회의가 열리고 ‘인간환경선언문’을 채택한 것을 기념하는 제15회 ‘세계환경의 날’이다. “인간은 품위 있고 행복한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 속에서 자유· 평등 그리고 적당한 수준의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생활조건을 향유할 기본적 권리를 가지며 현시대 및 다음 세대를 위해 환경을 보호개선 할 엄숙한 책임을 진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이 주님의 말씀은 지난 4년 동안 반공해운동에 참여해 온 나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공해란 인간의 활동에 의하여 발생하는 유해물질 또는 에너지가 땅·물·공기를 더럽힘으로써 자연과 생활환경이 침해되고 그것으로 인해 계속적으로 일반 공중의 건강을 해치고 그 지역의 자연과 생활환경에 피해를 주는 것을 말한다. 또한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기업이나 개인경영의 사업이 무계획적으로 국토와 자원을 이용하고 또 사회자본의 부족과 도시계획의 실패가 원인이 되어 발생하고 이것이 농·어민 및 시민의 생산과 생활을 방해하는 사회적 재해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나라의 공해문제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제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 땅의 공해는 독점의 소산이고, 억압의 소산이고, 분단의 소산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의식을 파괴하고,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이 국토를 파괴하고 있다.

그러나 근원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처음에 사람들이 이 땅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땅이 저주받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저주받은 땅에서 사람들이 회개는 하지 않고 서로 더 갖겠다고 양육강식의 싸움을 계속함으로써 애꿎은 생명들이 상하고 죽어가기 때문이다. 이 땅이 더욱 사람 살아가기 어려운 곳으로 변해가는 현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이 땅의 공해문제를 이야기 하자면 어쩔 수 없이 공업화 과정에서 자연환경의 지나친 수탈과 혹사 및 비인권적인 공업화 정책으로 빚어진 제반 공해와 생태계 파괴가 대기오염, 수질오염, 농약 및 중금속 공해, 원자핵 공해 및 소음공해 등을 불러 일으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현상을 이야기하게 되겠지만 그 근본원인은 철저하게 인간의 타락과 범죄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한 인간의 범죄와 타락은 그 범죄와 타락을 저지른 인간에게만 피해가 국한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전 자연계에 영향을 미치어 땅은 좋은 열매 대신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뿐이며 기근과 온갖 질병과 죽음을 인간에게 안겨준다. 바울이 탄식한 것처럼 자연과 만물의 신음은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의 신음으로 이어지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신음소리로 이어진다.(롬 8장) 그러기에 우리는 이 땅의 공해문제가 도리가 없이 분단체제와 군사독재체제 하의 공업화 과정에서 독점재벌들의 횡포로 빚어진 공해현상이기 이전에 인간의 타락과 범죄에 기인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결국 지금 각종 공해로 신음하고 있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해방되는 날과 우리의 몸과 우리의 땅이 이 공해로부터 해방될 날을 절실하게 고대하면서 성령의 깊은 탄식과 신음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금 이 땅에서 공해를 일으키는 힘과 세력은 이 세상을 만드시고 나서 “참 좋다!”고 거듭 감탄하시며 살들로 이 땅에서 마음껏 자유케 하신 하나님을 적대하는 악마의 힘이요 세력이다. 다시 말해 이 땅에서 일어나는 제반 공해의 주체는 악마와 그 졸도들이다.

본래 땅은 항상 거기 있고 그래서 땅 위에 사는 우리는 늘 그러려니 하며 땅을 기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늘 땅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땅을 떠나서는 우리는 한시도 살 수 없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이 땅을 밟고 그 위에서 생명을 기르는 삶을 살면서 그 위에 온갖 쓰레기를 버린다. 사람의 생명도 흙에서 왔다가 죽어서 쓰레기가 되어 다시 땅으로 돌아간다. 땅은 조용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이 모든 쓰레기를 부패시켜 곧 변화시키는데, 이 부패로부터 생명과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여는 힘을 만들어 낸다. 땅은 햇빛과 비를 받아 들여 그 위에 뿌려진 생명의 씨를 품어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여 30배, 60배, 혹은 100배의 수확을 내 수도 있다. 기름진 땅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humus(腐植土)라는 말은 이렇듯 땅에 떨어진 죽은 것들을 철저하게 썩히는 땅을 말하며 겸손이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한다. 그렇다! 땅을 외경하며 겸손하게 사는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 5:5)라고 축복하신 주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당이 무엇인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땅이 도저히 썩힐 수 없는 것들이 이 땅에 버려진다는 데 있다. 이로 인해 공해문제가 발생한다. 죽 본디 흙에서 왔으되 흙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이 공해문제를 일으킨다. 그것들은 인간들이 조작해낸 것들이다. 그것들이 공기를 더럽히며 물을 오염시키고 그것들이 다시 땅으로 돌아와 땅을 피폐케 하며 땅에 사는 농작물과 동물들을 병들게 하여 그것들을 먹고 마시며 호흡하는 사람의 목숨을 서서히 죽여가고 있다. 즉 땅에 떨어진 화공약품과 농약의 찌꺼기들이 땅으로 돌아와서 농산물과 동물과 인체에 해를 끼치며 공장 굴뚝에서 쏟아지는 중금속이 섞인 매연과 자동차가 토해내는 매염이 공기를 더럽혀 그것을 호흡하는 사람과 땅을 서서히 죽여가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이 공해의 공포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고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우리나라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쾌적하고 건강한 환경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한 생명”을 위협하고 거부하는 어떤 발전이나 반민중적 경제정책, 공업정책을 단연코 거부해야 한다.

작년 4월말에 일어난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건은 전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어 전 인류를 방사능의 공포에 떨게 했으며 반원전, 반핵운동을 세계적으로 확산시켰다. 소련 당국이 정확한 사고내용은 숨기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수십 명이 죽었고 십만 명 이상의 주민이 암에 걸릴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각종 동, 식물 및 수자원의 방사능오염이 우려되고 있는 가운데 스웨덴의 눈과 비에는 정상치보다 1백배나 넘는 높은 방사능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이 사고직후 당국은 우리나라는 안전하다고 말했지만 그 후 5월 5일 충주지방에 내린 비에서 방사능 낙진이 검출, 이 사고가 단순히 수만리 떨어진 소련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여 공포감을 느끼게 한 바 있다. 수만리 먼 나라에서 생긴 원전 폭발사고가 우리에게까지도 직접적인 피해로 닥쳐오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발전이나 진보가 천만사람, 억만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단 한 사람의 생명 또는 단 한사람이 생존권이라도 짓밟고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천하 보다 귀중한 생명을 지닌 사람의 일이 아니라 레기온 악령, 군대마귀의 짓이 분명하다.(막 5:1-20) 이천여 마리의 돼지 떼와 함께 모든 발전이나 부나 성장이 사라지더라도 우리는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예수는 엄청난 부나 발전보다도 한사람의 생명을 더 귀중히 여기신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거리는 연일 최루가스 공해로 눈도 뜰 수 없고 천하보다도 더 귀한 젊은 생명들이 차례로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이고 죽어가는 상황이다. 이러한 때에 전국을 뒤덮고 있는 공해물질들이 우리의 생명들을 간접적으로 서서히 죽여가고 있다는 외침은 우리 국민들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엔 너무나 작은 일처럼 보이고 민주화의 강한 물결 속에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더 이상 우리의 생명에 무서운 철퇴를 가하는 여러 공해문제에 대해 눈 가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 예수의 운동이 바로 하나님나라 운동이며 생명운동인데 반공해운동은 바로 생명운동이기 때문이다.

땅이 황폐하게 되고 바다가 죽고, 대기가 온통 산성가스로 뒤덮힌다면 설령 민주화가 된다 할지라도 이 땅에서 사람은 숨쉬며 살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반공해 운동은 바로 이 땅의 민주화 운동과 직결되어 보조를 맞춰 나가야 하는 것이요 바로 이 세상 한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소명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연과 인간 생명을 침해하는, 땅에 떨어져 썩지않는 모든 요소들을 철저히 배격하고 막아내고 없애야 한다. 땅은 곧 사람이다. 사람은 곧 땅이다. 사람은 자기가 밟고 있는 땅을 그대로 닮는다. 그러기에 이 땅을 새롭게 하겠다는 마음가짐은 곧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하겠다는 회개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저 옛날 이사야가 세상을 걱정하다 야훼 하나님의 현존을 뵙게 되자 바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해의 원흉 중에 끼어든 것을 깨닫게 되며 이 낙담만이 이 땅을 위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을 새롭게 받게 되는 길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온 천하보다도 귀한 목숨”을 갖고 있다. 이 귀한 목숨이 쾌적하고 건강하게 살도록,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분단, 억압, 독점의 소산인 이 땅의 공해문제를 풀어가는 것은 곧 이 땅의 민주화의 길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 땅은 우리시대의 것만이 아니다. 오는 세대가 쾌적한 환경 속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땅이어야 한다. 이 땅의 민주화의 날이 언제일지 몰라도, 또 남남북녀가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논 채/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하는”(신동엽) 남북통일의 그날이 언제일지 몰라도, 그날이 오면 부끄럽지 않은 땅과 사람으로 마나기 위하여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반공해운동은 우리 주님의 생명운동이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하고 모두 나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