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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눔/생각나눔

음식물이 된 쓰레기, 쓰레기가 된 음식물

 

새가정 20142월호 기고글 

음식물이 된 쓰레기, 쓰레기가 된 음식물 

안홍철 목사(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

 

작년 이맘 때의 일이다. 남대문 시장을 지나다 허름한 차림의 한 남성이 가게 앞에 내놓은 국밥 그릇으로 다가가는 광경을 보았다. 밥그릇도 비지 않았고 국그릇에는 국물과 건더기가 얼추 남아 있었다. 겨울비가 내려 쌀쌀한 날씨에 그 아저씨는 온기가 가신 국에 밥을 말아 엉거주춤 서서 허겁지겁 먹었다. 가게 주인이 버린 점심의 쓰레기가 배고픈 노숙인의 허기를 채워주는 음식물이 되었다. 쓰레기가 음식물이 되었다....

음식물은 먹거리인데 먹고 남아서 버리는 음식은 쓰레기가 되어 버린다. 우리나라의 인구가 증가하고 생활여건이 향상되어 음식물이 상당히 버려지고 있는데, ‘상다리 부러질 정도로 차려야 잔치라는 의식과 국물 음식을 선호하는 음식문화가 음식물 쓰레기를 증가시키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렇게 발생하는 음식물 쓰레기는 하루에 14,000톤으로 1년으로 계산하면 물경 20조원의 음식물이 버려지고 있다. 국민 1인당 발생량은 하루 0.35kg으로 이는 우리가 먹는 음식물의 1/7에 해당하며, 한 사람이 매일 1,100원을 음식물 쓰레기로 버리는 셈이다.

음식물 쓰레기가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정부는 배출량에 따라 요금을 부과하는 음식물 쓰레기 종량제를 전면 도입하였다. 환경부는 음식물 쓰레기 종량제로 음식물 쓰레기의 20%가 감량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며 실제로 10% 이상의 감량 효과가 입증되기도 했다. 잔반 감량을 위한 방안도 다양하다. ‘수다날’(수요일은 다 먹는 날)을 정하고, 잔반 저울 설치로 잔반을 남기지 않는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퇴식구를 이원화하여 잔반미발생자를 우대하는가 하면, 식판을 뷔페형 접시로 교체하여 반찬을 적게 담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또한 잔반 그린데이, 잔반제로 바구니 등 음식물 쓰레기 감량을 위한 노력들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음식물 쓰레기는 전용봉투, 납부칩제, 중량단위 전자태그(RFID) 시스템을 통하여 가축 사료, 퇴비, 에너지 등으로 재활용된다고 한다. 음식물 쓰레기 종량제에 힘입어 환경부는 음식물 쓰레기 재활용률이 95.3%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음식물 쓰레기의 70-80%를 차지하는 음폐수 처리 등의 문제로 일각에서는 재활용률이 40%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일부 지자체에서는 예산 부족, 음식물 쓰레기 재활용 시설 미비 등의 이유로 일반 쓰레기와 함께 수거, 소각하기도 한다.

흔히 지구상에서 쓰레기를 만드는 유일한 생물체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이는 산업사회의 대량생산 대량소비체제로 접어들면서 더욱더 현실적인 명제가 되어가고 있다. 급기야는 그 많은 쓰레기들이 해류와 바람에 떠내려가서 태평양에 거대한 쓰레기섬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또한 우리나라는 2012년까지 음식물 쓰레기를 해양에 방출했었다. 한때는 초근목피, 보릿고개라 해서 음식물을 얻는 게 큰 일이었는데 이제는 음식물을 버리는 것이 큰 골칫거리가 되어버렸다.

음식물을 먹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더 문제시되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1980년대 중후반으로 잡아야 할 것이다. 우리 음식문화의 변천을 잘 보여주는 지표 중의 하나가 삼겹살로, 1980년대 이후 대중들이 즐겨 찾으면서 이제는 가장 서민적인 음식으로 되어 버렸다. 70년대 이전만 해도 고기를 구워먹는 일이 드문 일이었고 양을 불려서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국을 만들어 먹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육식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게 되었으며 시장이나 마트에도 먹을 것이 넘쳐 난다. 음식 저장을 위한 가정용 냉장고 용량이 900리터나 되는 것도 있다.

먹는 것과 관련된 성경의 유명한 이야기는 만나(16)와 오병이어 이야기(6:1-15)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왔으나 먹을 것이 떨어지자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셨다. 만나는 아침에 지면 위에 이슬처럼 내린 음식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음식을 다음날 아침까지 저장하지 말라고 하셨다. 만약 지금 우리들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만나를 가득 주워 우리집 냉장고에 가득 채웠을 것이다. 오병이어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후에 예수님은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셨다. 지금 우리였다면 배불리 먹었고 배불리 먹이시는 예수님이 있는데 이 손 저 손을 거친 부스러기를 모아서 뭐하겠냐며 그냥 버렸을 것이다. 한 이야기에서는 남겨두지 말라고 하시고 다른 한 이야기에는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신다. 혹시라도 우리는 남겨두지 말 것은 저장하고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쉽게 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왜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저장하고 필요 이상으로 먹으며 필요 이상으로 버리는 것일까? 나와 우리 가족을 우선하여 생각하는 개인주의적 생각 때문이 아닐까? 고전파 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업자, 양조업자, 제빵업자들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개인이익 추구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서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손은 거대 다국적 대기업가와 국제 금융자본가들과 세계 곡물메이저들의 손임이 밝혀지고 있다. 그들은 모든 소비자가 개인적으로 사고하고 개별적으로 행동하기를 바랄 것이다. “내 돈 내가 벌어서 내가 쓰고, 내가 사고, 내가 저장하고, 내가 버리는데 무슨 상관이야?” 이러한 개인주의적 사고가 팽배해지면서 사회적 양극화도 심해지고 가족구조가 소규모화, 분절화되면서 가정에서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도 더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는 것을 보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돌아보게 된다. 어릴 적만 해도 밥 한 알도 남기면 혼났고 그릇이 뚫어져라 박박 긁으면서 밥을 먹었다. 혹 음식을 넉넉하게 장만할 기회가 생기면 이웃집에 음식을 나누며 서로 주고 얻어 먹으면서 지냈다. 음식물이 쓰레기가 되는 이 낯설고도 익숙한 풍경속에서 음식물 쓰레기 종량제 같은 법과 제도만 잘 정비되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부담금만 잘 내면 된다는 식의 사고로는 음식물 쓰레기가 던지는 사회적이고도 문화적, 윤리적인 문제를 넘어설 수 없다. 다만 개개인의 마음과 태도가 변하고 사회의 문화가 변화해야 음식물 쓰레기라는 불편한 진실을 직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태양이 주는 에너지를 광합성하며 우리에게 먹을거리가 되는 식물과, 식물을 먹고 단백질 에너지를 축적한 동물의 장구한 역사와 노력과 희생을 충분히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에 대해 반성하다보면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왕상 17:8-16)가 예전과는 달리 읽혀진다. 극심한 가뭄이 한창일 때에 엘리야 선지자는 사르밧의 한 과부에게로 가서 떡 한 조각을 달라고 한다. 과부에게는 자기와 아들이 한번 부쳐 먹을 정도의 밀가루 한 움큼과 조금의 기름만 있었다. 과부는 자기 가족이 먹을 것도 부족했지만 생면부지의 엘리야까지 먹이려고 결단하였다. 나와 내 가족만 돌보지 않고 그보다 큰 공동체를 돌보려고 한 정성이 느껴진다. 한 움큼의 가루를 부쳐 먹을 때 과부는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간절한 심정으로 감사하였을까? 또한 단 한 점의 밀가루와 단 한 방울의 기름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실천이 돋보인다. 공동체를 생각하고 음식에 감사하며 남기지 않으려는 작은 실천이 과부의 생활의 피폐함을 넘어 먹고 마시며 풍족한 우리에게도 상당한 도전이 된다.

이러한 실천을 교회의 공동식사에서 체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다음 행사를 치루기 위해 으레 먹는 급한 식사 말고 나를 넘어서 더 큰 공동체의 안녕을 바라고 음식을 주신 하늘의 배려와 땅의 정성에 마음으로 감사하며 한 알의 밥알도 한 점의 반찬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우려는 태도와 다짐이 있으면 우리의 식사 습관에도 조용하게 변화가 올 것이다. 이러한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주님이 가르쳐 주셨듯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여 받고 먹는다면 하루 하루 주시는 그 밥과 반찬이 참 달고 각별한 맛을 줄 것이다.

믿음이 좀 더 자라고 마음이 더 커져서 가게 앞을 기웃대던 노숙인 아저씨와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놓고 삶과 살아감에 감사하며 그릇을 싹싹 비우고 싶다.